기타등등 이야기

순수미술 전공해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2편_디자인과 회화는 접근 방식이 다르다?

dwiggy 2025. 4. 14. 09:00

예고 시절 전공을 선택할 때 우리 기수는 순수미술과로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일단 디자인과의 서울대/홍대 진학률이 다른 과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동기들 사이에서 순수미술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디자인과 전임선생님 중 한 분이 그랬다. “디자인과 순수미술은 접근 방식이 달라서 전공은 순수미술 하고 나중에 디자인할 생각이면 절대 불가능하다”라고.

나는 누군가의 특색을 담아내려했던 작품. 그러나 내가 그려내려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의 해석에 달렸다.

틀린 말은 아닌게, 양쪽을 걸쳐본 경험에 따르면 순수미술은 다양한 해석을 열어두고 그 해석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예술을 향유하는 과정이지만 디자인은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디자이너의 의도적인 작업 결과물이 따라온다. 전공으로 디자인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던 나는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를 다닌 덕에 다행스럽게도(?) 디자인과 회화의 중간 정도인 컨셉 디자인을 먼저 경험했다.

배경 컨셉 디자인(낮)
주인공 캐릭터의 변신 과정 컨셉과 컬러 디자인

감독의 요청에 따른 의도는 분명히 있지만 시청자의 해석의 여지 또한 열려있는 컨셉디자인 업무를 진행하면서 나는 순수미술인의 뇌구조에서 디자이너의 사고방식을 점점 첨가하게 되었다. 이 경험이 없었다면 추후에 누군가의 디자인적 요구를 담아내는 능력이 지금만큼 생기지 않았을 것 같다. 가장 최근의 업무인 마케팅 콘텐츠는 전략에 따른 의도가 100퍼센트인 작업인데 다행히 기획담당 과장님은 나에 대해 본인이 원하는 컨셉을 알아서 찰떡같이 만들어온다고 평가했다.

메인 페이지에 사용했던 제품 키비주얼 모음.jpg
컨셉디자인 경험이 있다보니 이런 판촉물 디자인도 가능했다


키비주얼을 만들다보니 상세페이지에 들어갈 이미지를 만드는데 참여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웹디자인도 요청을 받게 되었다. (물론 급한대로 되는 사람에게 시키다보니 내가 하게 된 경향도 있다) 홈페이지에 들어갈 영상 만들다 홈페이지를 통으로 디자인한 적도 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일이라는 건 해내면 해낼수록 물이 퍼지듯 옆으로, 깊은 곳으로 번져간다. 그러다보니 예술가를 꿈꾸며 미술을 배우던 중학생이 어느 순간 디자이너라고 불리고 있다. 굶지 않기 위해 일을 시작했지만 매일의 일을 해내다보니 경험이 쌓이면서 회사에서 나를 증명할 기회가 주어졌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너무 이것저것 하는 것도 문제는 문제다..)

세상에 뛰어난 디자이너들은 많지만 나는 순수미술 출신인 덕에 내가 만드는 작업물에는 그 배경이 주는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 전공도 경력도 후회하지 않는다. 미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하에 다시 돌아가도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이 일을 할 것이다. (이왕이면 돌아가고싶진 않다. 20대의 나는 워라밸붕괴이기 때문에..) 미술을 선택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