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미술 전공해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1편_내가 이렇게 된 배경

미술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나는 사실 선택지가 그것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부모님은 공부하라는 소리는 안 하지만 나중에는 꼭 전문직을 가져야 하고, 빨리 장래를 선택하라는 압력을 주었다. 그때 나는 공부를 좀 하는 편인 그냥 평범한 중학생이었는데 내 주변에 미래 직업을 구체적으로 선택한 사람이라고는 예고 미술과에 재학 중인 언니와 미술학원 다니는 친구들뿐이었다. 그러니까 내 세계는 둘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미술 하는 사람과, 아직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은 (기본적으로 내신성적 관리를 위해 공부를 하기는 하는) 친구들. 전자는 장래를 선택한 집단, 후자는 선택을 유보한 집단인데 빠른 선택을 요구한 부모님에게 부응하려면 나는 미술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미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내 부모가 조금 더 섬세하게 확인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0대를 넘어서서 스스로에 대해 잘 알아보니 나는 창의력이나 아이디어가 뛰어나기보다는 논리나 분석이 맞는 것 같다. 차라리 선택을 유보한 채 공부를 더 했어야 했다.
얼레벌레 미술학원에 가서 연필소묘를 배워보니 어릴 때부터 만화 좀 그린 짬이 있던 나는 연필 다루는 스킬이 다른 친구들보다 쪼끔 나았던 것 같다. 그걸 재능이라고 착각했는지 미술학원 선생님은 예고 입시를 강력추천했고, 이미 언니의 경험이 있었던 엄마는 쉽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예고에 진학했고, 나는 처음부터 서양화를 전공할 생각이었다. 내 주변에 다른 과는 없었으니까.(어린 시절의 나는 참 아무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마찬가지. 하던 거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성적이 모자라지는 않으니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서 야 나는 내 진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일반적으로 계속 그림을 그리려면 가장 수월한 방식은 대학원 진학인데 부모님은 도와줄 사정이 못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계속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서라도 대학원에 진학할 것인가 아니면 취업하여 돈을 벌 것인가. 그러나 대학시절을 소금밥 먹고 버텼던 나는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내가 가장 빠르게 팔 수 있는 기술을 팔아서 취업했다. 그게 영유아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린스크린 따서 배경 합성하고 변신 특수효과 입히는 알바를 하러 갔다가 3D를 아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눌러앉게 되었는데 본격적으로 CG쪽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처음 내 포지션은 배경과 캐릭터 어셋을 디자인하고, 3D로 제작하는 일이었는데


서양화 전공했으니 컨셉아트도 그려라, 니가 그린 컨셉아트 색깔이 맘에 드니 그런 톤으로 전체 룩을 디자인해라, 에피소드마다 필요한 컨셉이미지도 좀 부탁하마, 하는 김에(?) 2D배경도 디자인해라. 하지만 3D어셋 제작은 여전히 나의 업무인 것. 그렇게 맡은 일이라는 것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참고로 월급은 거의 최저 임금에 가까웠다. 야근은 또 얼마나 했는지 기본이 9to9이었다. 위 인스타 피드를 작성할 때는 이상하다고 못느꼈지만 지금 보니 특이한 문구 ”오늘은 야근 땡땡이“. 그래도 그때의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었구나 라고 퇴사 당시 작성했던 피드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첫 직장부터 업무를 넓히는 것에 익숙해진 탓인지 나는 일을 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새로운 업무에 도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