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등등 이야기

내가 미술 외길 20년이라니

dwiggy 2025. 4. 10. 10:36

10대에는 20년 동안 무언가를 하면 대단한 전문가가 되어 실수 없이 실패 없이 걱정 없이 고민 없이 그 분야에서 먹고살 수 있을 줄 알았다. 20년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20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가 대단하다고 느꼈으니까. 그러니까 15세에 미술을 시작한 나는 35세쯤이면 걱정 없는 예술가가 되어있겠지?

19살의 내가 그렸던 그림들.jpg


20대 초반에는 내가 미술에 재능이 없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세상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 너무 많고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너무 많다. 세상에는 훌륭한 아티스트는 널리고 널렸고, 주변에 같이 대학 다니는 동문들만 봐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언가에 비하면 내 결과물은 허접하고 별 거 아니었다. 심지어는 대학을 다니면서 전공도 아닌데 그 나이에도 음악으로 인정받는 오혁 같은 사람도 있었다. (혜성처럼 나타났던 슈퍼스타 오혁 님.. 발표한 음악을 들어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깨달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예술적 감수성이나 창의력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저 시간을 들여 그림을 그리는 법만 알고, 작품이 좋은 이를 논리적으로 찾는, 쉽게 말해 머리로 아트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어딘가 대학때 작품들 자료들이 더 있는데 당장 찾을 수 있는 건 이것들뿐이라니. 접근 가능한 곳에 저장을 잘 해두자


미술은 돈이 많이 든다. 단순히 교육비나 재료값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작품이 인정받을 때까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작업에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 돈이 많든, 천재성으로 빠르게 내 그림이 팔리든 뭐가 됐든. 안타깝게도 대학을 입학하는 순간부터 본가는 돈이 없었고, 내 밑에는 한참 어린 동생도 있었고, 나는 이미 대학생 때 등 떠밀려 경제적으로 자립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어떻게든 혼자 방세를 내고, 학자금을 갚고, 나 하나는 먹고 살만큼 돈을 벌어야 했다.

이제는 내 가정의 가계소득 50퍼센트인 3D/영상/디자인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간다. 나는 미술학원 다니던 중학생 때부터 시각예술만 20년 차. 그런데 아직도 뭘 온전히 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 모르겠다. 이거 안 배웠으면 10년 굶었겠다 싶은 3D 그래픽도, 대학 때부터 열심히 들고는 다녔던 카메라도, 20년을 그려온 그림도 여전히 하면 할수록 새롭고 모르는 게 있는데 요즘은 또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AI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들 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더니 가히 그렇다.

그러나 나는 유행같은 거 못 따라가는 꼰한 사람이라 실존하는 세상의 경험에서 차원이 다른 만족을 느낀다. 그중 단연 최고는 내 아이 사진을 찍을 때.


대학을 다닐 때 한 교수님이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자신의 직업란을 ‘예술가’로 채울 수 있었다”라고 했다. 그 말이 뇌에 박혀서 그런지 나는 이제 20년 동안 산재한 내 경험에 방향성을 고민하고 싶어졌다. 나는 대체 뭘 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 생각에 돌아보니 나는 참 게을러서 정리도 기록도 없어 내가 해온 것들은 시간 속에 스르르 흩어져 버렸다. 뭘 할 줄 아는지 몰라서 다시 배워야 할 참이다. 읽고 싶은 책은 한가득인데 읽어야할 책은 더 많고, 무언가를 배우는데 시간은 더 많이 필요하지만 일도 하고 아이도 키우는 상황에서 내 시간을 써야하는 일은 끝도 없다. 가난한 대학생때는 시간이라도 팔아서 돈을 벌고 싶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썩어났으면 좋겠다.

아이는 약속한 것을 절대 잊지 않고 사소한 것 하나 일일이 삐치지만 나는 화장실 갔다가 아이 방에 가기로 하고선 돌아서면 까먹고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시 접근 가능한 곳에 기록하고 저장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의 뇌는 더이상 디테일한 기록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언젠가  내 아이가 “엄마는 무슨 일 해?”라고 물어봤을 때 자신있게 확신에 차서 알려주고 싶기도 하다. 지금 할 수 있는 말이란 고작 ‘이것저것해..’ 뿐이다.